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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세이/생활의발견

커피카피아가씨

hkzeze 2016. 11. 23. 15:57


경영관리는 경영학도라면 반드시 들어야 하는 필수전공과목이다. 대학에서는 경영관리를 듣지 않으면 회사에 들어가서 아무것도 못하는 것으로 배웠다. 그러나 이 과목을 들었던 나도 입사 후 정말 아무것도 못한다는 훈계를 들은 적이 있다. 커피를 못 탄다는 이유에서다.

 

1980-1990년가 배경인 하는 드라마를 보면 심심치 않게 미스김, 여기 커피 한 잔만이라는 대사를 들을 수 있다. 그들의 성은 다양했으나 앞에 미스는 여성이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직함 같은 것이었다. 커피를 만들고 자투리 시간에는 서류 파일을 정리하고 테이블을 닦는 것이 2번째 업무다.

 

경영관리를 줄여서 경리라고 부른다. 그러나 실제 경리는 내가 대학에서 배운 두꺼운 책 내용과는 거리가 먼 일을 도맡아 했다. 사무실 청소, 커피 타기, 잔심부름…. 그야말로 오피스버전의 주부였다. 이러한 모습이 관습처럼 굳어져, 너도나도 페미니즘이라고 외치는 지금도 커피는 여자가 타야 제 맛인 사회가 되었다.

 

존 스튜어트 밀은 <여성의 종속> 1장에서 여성의 실체가 주도 면밀하게 가려져 있기 때문에 그 능력 또한 여성 자신도 알 수 없다고 했다. 그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처음부터 없었으며 여성의 실체를 알려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성은 커피를 타고 잔심부름을 하는 것을 여성이 가진 능력의 모두라고 보았다. 이러한 이유로 존 스튜어트 밀이 이 책에서 주장했듯 남성이 여성에 대해 얻을 수 있는 지식은 지극히 불완전하고 피상적이다. 하지만 그 불완전하고 피상적인 지식을 사회통념으로 보는 까닭에 아직도 커피를 타는 건 여자 몫이다.

 

우리나라 힙합가수 매드클라운이 2015 1월에 발매한 3번째 미니앨범 ‘Piece of Mine’에는 커피카피아가씨라는 노래가 수록되어 있다. 이 노래의 가사 중에는 우리나라 경리의 실제 업무를 적나라게 묘사해 놓은 부분이 있다.

 

고분해라 상냥해라 커피카피아가씨

사무실의 꽃으로 남아라

 

그런데 이 곡은 1992 1, 안혜경의 2집 앨범 침묵의 봄에 있는 노래를 다시 편곡한 곡이다. 1990년대 사무실에서 여성의 업무를 풍자한 노래가 20년이 지나서도 우리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는 것이 비극적이지 않은가.

 

최근 어느 SNS를 봐도 여성혐오에 대한 칼럼, 기사, 의견들이 스크롤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넘친다. 그 현상을 보며 여성혐오의 뿌리, 그 끝은 어디인지 고민한 적이 있다. 그 답 역시 존 스튜어트 밀의 <여성의 종속> 1장에 있는 듯하다.

 

여성들 대부분이 그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 역시 자신의 능력을 모르고 있다. (중략) 여성이 문학에서 성공할 수 있는지 여부는 남성의 손에 달려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여성의 말을 잘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략) 관습과 다수 남성의 생각을 철칙처럼 따르도록 교육받고 자란 여성이 감당해야 할 어려움에 대해 우리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즉 여성이 가진 참된 본성에 대해 무지한 남성이 단단한 여성혐오의 뿌리임에도 왜 여성은 그것밖에 못하냐고 잎사귀 탓만 하고 있다. 싹은 따뜻한 대기 아래에서 적당한 물과 풍부한 양분을 섭취해야 잘 돋는다. 그러나 여성혐오 사회는 싹이 따뜻한 김이 서린 목욕탕에서, 아니면 눈보라 치는 데서 살지 않으면 죽는다고 믿는 것과 같다.

 

존 스튜어트 밀은 <여성의 종속>에서 여성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는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했다. 이 책이 19세기에 나왔으나 100년도 더 지난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남성이 만든 사회 속에서 경리라는 직무가 얼마나 가벼운 이미지가 되었는지, 커피 심부름에 여성의 인력을 얼마나 낭비해왔는지는 따지지 않은 채 여자는 커피나 탄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심각한 폭력이나 왜곡된 거대 권력이다.

 

이러한 폭력과 권력이 바탕인 토양을 뒤집고 커피카피아가씨잎사귀를 잘라내어 여성혐오를 뿌리째 뽑아야 비로소 제대로 된 싹을 피울 수 있지 않을까. 사무실의 꽃이 될 싹이 아니라, 사회에서 저마다 능력과 아름다움을 펼칠 떡잎으로 말이다.

 

 

참고

존 스튜어트 밀, 서병훈 옮긴이, <<여성의 종속>>, 책세상 문고 고전의 세계, 2005

매드클라운, 커피카피아가씨, 3번째 미니앨범 Piece of Mine, 2015.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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